수줍은 여자들은 소심하게 들이댄다. 이해는 간다. 대놓고 들이대긴 부담이 따르는 법이지. 어제도 소심한 들이댐을 하나 당했다. 수업에 들어갔는데, 못보던 중국 아가씨가 하나 있길래 인사를 했다. 그리고 처음 보면 하는 얘기들이 시작된다. 어디서 왔냐, 뭐 공부하냐, 뭐 이런 것들. '처음 보면 항상 하는 얘기'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이 아가씨가 소심하게 들이댄다.
"혹시 가족과 함께 왔어?"
이건 뭐 너무나 명백하게 들이대는 거 아닌가. 마치 집 앞에서 가장 가까웠던 편의점의 아가씨가 보여줬던 그 명백한 태도처럼 말이다. 나는 거의 매일 비슷한 시간에 그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곤 했다. 그때마다 그 아가씨가 있었는데, 얼마나 수줍어하는지, 내 눈을 제대로 못 봤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숨기느라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하곤 했었다. 결국 그 여자는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다면 거둔 것이, 그 여자는 끝까지 자신의 마음을 내게 들킬만한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소심하고 수줍은 아가씨 같으니라구.
비슷한 일이 몇 주 전에 또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밤 10시쯤 집에 가는 학교 버스를 탔다. 내가 내리는 정류장 바로 전 정류장은 학생들이 우루루 내리는 곳이다. 그곳에서 버스가 거의 텅비었는데 어떤 예쁜 아가씨가 내쪽으로 걸어온다. 버스는 텅 비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옆에 살그머니 앉는다. 역시 수줍고 소심한 들이댐이다. 아마도 말 걸어달라는 거겠지. 하지만 그런 것에 쉽게 넘어갔다면 지금의 나는 아마 없었을 거다. 그 간절함을 애써 외면한 채 묵묵히 앉아 있었다. 잠시 생각해보니 그 아가씨가 너무 무안하겠다 싶었다. 그래 그렇게 꼭 창피를 줄 필요는 없지. 혹시나 부끄러움을 못 이겨 오늘밤에 돌이킬 수 없는 짓이라도 저지른다면? 사람 하나 살리는 셈치고 말을 걸어주기로 했다. 고전적인 걸로다가.
"저 이번에 내리는데요."
마침 버스는 정류장에 거의 다 왔고, 그 아가씨는 수줍게 날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는 조용히 버스에서 내렸고, 그 아가씨 역시 버스에서 내리고 말았다. 뒤돌아봐야할까? 에이, 여자애가 용기가 있으면 말을 걸겠지. 그냥 앞만 보고 걸었다. 결국 그 아가씨는 끝까지 내게 말을 걸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래도 오늘밤에 돌이킬 수 없는 몹쓸 짓을 저지르지는 않겠지. 내가 기회를 한 번 줬으니깐.
여자들은 항상 어찌나 수줍어하던지.
나한테 끝끝내 자신의 마음을 완벽히 숨겼던,
전혀 아무런 내색도 비치지 못했던 당신들,
난 보기보단 그리 어려운 남자가 아니라구.
@ 2008-11-15 09:38:10
'다르다'와 '틀리다'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정말 지겹다. 그런데, 이 지겨운 이야기를 정반대로 볼 수도 있다.
그 지겨운 이야기 중에서 초반부, 즉 우리의 현상을 옮겨와 보면, 한국인의 언어 습관에서 '다르다'와 '틀리다'는 쉽게 교환하여 사용된다는 것이다. 즉 '다르다'와 '틀리다'가 의미의 지도에서 꽤 붙어 있는 셈이다. 지겹지만 반복해보면,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는 게 그 '지겨운' 이야기의 요체다. 그런데 그 반대로 볼 수도 있다. 그 둘의 위치가 꽤 붙어 있다는 것은 '틀린 것'을 '다른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즉 전자의 논의가 그저 다를 뿐인 것을 틀린 것으로 생각하게끔 만들어서 '다름'을 '옳고 그름'의 문제로 생각하게끔 만든다는 것이라면, 후자는 '옮고 그름'의 문제를 '다름'의 문제로 생각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후자로 생각하면 전자와는 반대가 된다.
사실 '다르다'와 '틀리다'가 혼용된다는 것이 어떤 사회 분위기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를 하려면 훨씬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 내가 보기에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이면서도 다르다와 틀리다가 엄격히 구별되는 사회도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또 앞에서의 논의처럼 다르다와 틀리다가 혼용이 되지만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도 생각할 수 없는 게 아니다. (그 사회를 보면서 어떤 외국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할지도 모른다. "저 나라에서는 틀리다는 말과 다르다는 말이 잘 구별 안 된대. 저 나라에서는 틀린 게 아니라 그저 다른 것일 뿐인가봐")
*ecily - 뭐 논점과는 관계가 먼 것 같지만, 경험적으로는 다르다와 틀리다가 혼용된다기보다 다르다 대신에 틀리다를 쓰는 경우가 많고 그 역의 경우는 드문 것 같습니다.
*anggi - 저 역시. 틀리다 대신에 다르다 쓰는 경우 보기 힘든 것 같아요.
위의 댓글들에 대해서는,
말씀들하신 것처럼 틀리다 대신에 다르다를 쓰는 경우는 보기 힘듭니다. 그러면, 틀리다가 다르다를 집어삼킨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르다가 틀리다로 침투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즉 이런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누군가가 "그건 틀렸습니다!"라고 이야기할 때 "틀린게 아니라 그저 다른 게 아닐까?"를 생각할 수도 있게 된 거죠. 이건 "틀리다"와 "다르다"가 엄격히 구별될 때는 생기지 않는 일이고요.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그렇다 아니다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두 단어의 의미의 이동이 꼭 어느 한 쪽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쓰이지는 않을 수도 있다...뭐 이런 겁니다.
女: "남자들은 왜 그러는지 몰라요. 얼굴 예쁜 거 좀만 지나면 시들어 버리는 거고, 그저 겉 껍데기 한 장에 불과한 건데
말이에요. 돈 같은 것도 있다가 없을 수도 있는 거고, 없다가 있을 수도 있는 거고요. 전 시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고 쉬이
변하지 않는, 그리고 덧없이 사라지지 않는, 그저 피부 한 꺼풀이 아닌 그런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男: "예를 들면요?"
女: "키요."
@ 2009-01-10 07:50:26
나는 어떤 사람들은 토론에 대한 오해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첫번째 오해는 '논리'가 토론의 결과를 결정짓는다는 믿음이다. 만일 세상에 널려 있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최선의 결과를
'논리'에 의해 도출할 수 있다면 그 문제들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누가 봐도 참거짓이 분명한 결과들인데 어찌 이견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세상의 많은 문제들은 오히려, 양방이 (또는 그 이상의 견해들이) 어느 쪽이 (모든 사람에게) 옳거나 바람직하다고
결론 내릴 수 없는 문제들이다. 따라서 각각의 견해들이 최선을 다해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면 (즉 내적인 논리적 일관성 정도는
갖춰준다면) '논리'에 의해서는 결정 나지 않는다.
다만 각자의 논리의 전제들이라든가, 문제가 현재 놓여 있는 상황이라든가, 사용하고 있는 데이터의 한계 (사회 현상들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등이 있을 뿐이고 이러한 전제들과 데이터들을 어떤 시각에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출발점과
중간지점들에서의 방향 변화가 달라지고 다른 결론을 내어놓는 것이다. 즉 논리적으로 무결한 서로 상반되는 두 서너 대여섯 가지의
주장이 있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이러한 주장들을 '논리'적으로 공격할 수는 없다.
두 번째 오해는, 토론이 어느 하나의 결론을 선택하기 위해 행해진다는 믿음이다. 이것은 토론의 목적을 '승부'와 연관짓는
관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 많은 문제들은 어느 한쪽이 옳거나 그르거나하지도 않고, 어느 한쪽이 항상 바람직하거나
하지도 않기 때문에 승부라는 것은 많은 경우에 무의미하다. 물론 어느 한쪽을 주장하고 있는 특정 인물이 그 주장에 대해 '최선의
논리적 구조물'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그 토론에 참여하고 있는 인물이 그 주장의 최선의 논리적 구조물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적으로 그 방향의 주장이 결함이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다) 그것은 단지 그 사람이 그 주장의 최선의 논리적 구조물을 축조하지 못했음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토론경진대회' 따위에서는 이런 것이 문제가 될 수 있고, 현재의 경진대회 참여자 중 누가 최선의 논리적 구조물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승패를 가를 수도 있겠지만, '토론경진대회'가 아닌 이상, 그리고 각각의 주장들이 최선을 다했을 때
'논리'적으로는 결함이 없는 구조물을 가질 수 있다고 자비롭게 가정해준다면, 특정 상대의 논리가 허술하다는 것 자체가 그 방향이
'틀렸거나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오히려 토론은 승부를 내거나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자의 주장을 더 명료하게 만들기
위해서 (각자의 주장이 무엇을 전제하고, 어떻게 구성되고, 어떤 근거에 기반하는지), 그리고 다른 주장들이 왜 다른지, 어떤
다른 전제를, 효과를,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토론을 한다고 생각을 한다. 물론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시키는 것이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경우도 있지만, 그 결론을 위해서는 각자의 주장이 더 명료해져야할 필요가 있고 다른 주장들이 왜 다른지를
알아야한다. 여기에서 토론의 목적은 달성되는 것이고, 그 다음, 즉 하나의 결론이나 승부는 내어도 좋고 안 내어도 좋은 것이라는
것이 나의 토론에 대한 관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토론에 대한 관점이, '결론도 안날 문제에 대해 왜 토론하고 있느냐'에 대한 나의 대답이기도 하다.
@ 2009-01-24 22:00:05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세상'에서, 많은 비율의 사람들은 결국 가난하다. 그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 중 가장 순진한 말은,
"그럼 너도 부자가 되어라"
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당연히도 꽤나 강력해서 참 잘 먹힌다. 이 말이 잘 먹히는 동안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세상'에서 가난은 자신의 탓이 되어버리고만다. 자신의 피 탓이다.
부르주아 계층의 귀족에 대한 승리 이후 속한 가문이 지위를 결정하기보다는 그래도 조금은 더 나아보이는 '능력' 위주의 사회가 되었다고는 했다 치자. (물론 여전히 어느 집에서 태어났느냐, 즉 자신의 능력이 아닌 부모의 능력과 부과 많은 것을 좌우하지만 자신이 똑똑하면 어느 정도 잘 먹고 살 수 있는 사회라고 하자)
그렇다고 한들, 타고난 능력이라는 것이 태어날 때 속하게 되는 가문과 그리 다를 바는 무엇인가. 능력은 있지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을 돕는 능력 있는 사람들과,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형편이 어려운 귀족을 돕는 귀족들이 다를 바는 또 무엇인가?
"능력 위주의 사회"라는 것이 귀족 사회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관점 중 하나는, 사회 전체의 퍼포먼스를 높여서 그 잉여로 인해 가장 가난한 사람의 삶이 더 나아지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는 능력 위주의 사회의 정당성은 그 능력 있는 사람들의 부가 능력 없는 사람들에게로 흘러들어가 삶을 낫게 만들어줄 때만 확보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능력 있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사회"라는 것 자체는 "좋은 피를 타고난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다르게 들리고 느껴지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기회의 평등'을 이야기하는데, 좋은 얘기다. 그런데 기회의 평등은 그것으로 만족해야할 가치가 아니라, 최소한 지켜져야할 가치다. 기회가 동등하게 주어진다고 했을 때 능력 있는 사람이 좋은 결과를 얻게 마련이다. 그러면 능력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기회는 동등하게 주어졌으니 능력 없는 사람들이 비참하게 사는 것은 그냥 눈감고 넘어가야할 일일까? 누구도 그렇게 얘기하지는 않겠지.
나는 '자비심에서' 누군가를 도와야한다면, 능력은 있는데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의지도 있는데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능력도 의지도 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겠다. 이들이 가장 약자들이니까 말이다. 능력이나, 의지가 있는데도 죽도록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는 '자비심'의 문제가 아니기도 하고.